(무비게이션)‘소리도 없이’, 결국 이게 진짜 세상이다


‘악의 평범성’ 그리기 위한 ‘아이러니’ 투영…영화 속 역설의 세상

크게 크게 작게 작게 2020-10-12 오전 12:00:01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이상한 세상이다.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다. 나쁜 것은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좋은 것이 나쁜 게 될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삶 속에서 선과 악의 구분을 교육 받고 습득하고 경험하면서 사리를 분별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영화 소리도 없이속 모든 사람들은 정말 이상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본능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느끼고 판단했던 모든 것들이 그 사람들로 인해 뒤엎어져 버린다. 이런 방식을 일반적으로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하지만 소리도 없이속에 등장한 모든 것을 아이러니란 단어에 묶어 버리기엔 너무도 이상하다. 사실 이상하단 말로도 표현되기엔 부족하다. 한 발 더 나아가 보면 이 영화 속 세상은 사실 진짜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모두 거짓이라고 습득하고 그 습득된 정보를 바탕으로 인식하게 된 판단의 오류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게 진짜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린 이걸 보면서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인식하는 실마리가 사실과 거짓 사이 혼란을 만들어 내면서 소리도 없이는 우리의 무의식 속 잠재된 판단의 오류에 찌릿한 자극을 전달시킨다. 우리가 알고 있었지만 몰랐던 그것이다. ‘소리도 없이는 지금의 우리 삶을 지배하는 본질이다. 이상함이 이상함으로 인식되고 있단 것 자체가 이 영화는 이상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독일 태생 유대인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쓴 에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악의 평범성은 특별하고 대단한 인물이 악을 유발한다고 보지 않았다. 조직의 시스템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순응에 의해 발생된 을 말한다. ‘소리도 없이속에서도 그런 악이 등장한다. 문제는 이 영화가 그 지점을 도 아닌 도 아닌 그렇다고 펑범도 아닌 이 모든 것을 넘어선 또 다른 지점에서 해석을 하려 든단 것이다. 세계 최고 정치 철학자의 개념을 넘어섰단 과대평가를 지적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영화는 기묘할 정도로 상황 속에 순응된 도 아닌 그렇다고 도 아닌 평범의 범주를 넘어선 일상의 연속을 담아냈다. 그 모든 게 우리의 지금과 너무도 맞닿아 있어서 소름이 끼친다.
 
범죄 조직 뒷처리를 담당하는 청소부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믿음의 관계로 묶여 있다. 인간의 사회적 시스템을 이 두 사람 관계 속에 눌러 담아 버렸다. 지배와 피지배, 주종의 관계, 역설과 순응이 두 사람 모습 속에 온전히 담겨 버렸다. 창복은 불편한 한 쪽 다리, 하지만 굳건한 종교적 믿음을 통해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의 곁에 있는 태인은 말을 못한다. 안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은 소통의 도구다. 그는 창복, 그리고 어린 여동생(인지 사실 명확하지도 않다)과만 소통한다. 때론 관계의 시작조차 불명확한 할머니와도 뜨문뜨문 대화를 나눌 뿐이다. 대화는 말이 아니다. 몸으로 말한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태인의 말이 또렷하게 들리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태인은 아마도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에 말을 안 하는 것 같다.
 
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 사진/(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그런 두 사람이 어느 날 한 소녀를 맡게 된다. 죽은 사람 뒷처리만 담당하던 그들이 산 사람을 맡게 된 것이다. 역설의 시작이다. 삶의 관계는 산 사람과의 관계만을 말한다. 하지만 창복과 태인은 서로를 제외하면 산 사람과의 관계는 의도적으로 단절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때문에 소녀와의 관계 맺기에 혼란을 겪는다. 관계의 역설이 시작됐고, 이제 상황의 아이러니가 발생할 동력이 만들어졌다.
 
소리도 없이가 영리하다 못해 얄미울 정도로 보인 점은 여기서부터다. 창복과 태인을 통해 아이러니의 동력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졸지에 창복과 태인에게 유괴 아닌 유괴가 된 소녀 초희(문승아)를 통해 그것을 만들어 냈다. 초희는 태인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태인의 여동생 그리고 태인을 쥐고 흔든다. 초희와 태인의 주종관계가 역전된다. 개념은 그렇지 않은 데, 상황이 그것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그 상황을 이끄는 게 어린 초희다. 초희는 상황을 만들고 끌어 가면서 자신의 위치를 변화무쌍하게 올리고 내리고를 반복한다.
 
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 사진/(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초희가 그렇다면 다른 인물들은 어떨까. 창복은 잠시 보호만 해도 됐던 초희가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자신들이 유괴한 것으로 상황이 변화되자 그 상황을 깨트리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한다. 범죄 조직의 끔찍한 상황을 마무리하던 창복의 실체와 달리 그의 상황 대처 능력은 허술하다 못해 소심하고, 소심하다 못해 한심하다. 현실의 끔찍한 상황, 믿음의 굳건한 내면이 충돌하면서 벌어진 아이러니한의 파장을 감당할 깜냥이 애초부터 없던 인물이다. 그런 창복이 태인과의 관계에서 주체가 된 것도 이 영화가 말하는 일종의 역설을 반증하는 장치일 뿐이다.
 
그들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도 그렇다. 창복과 태인, 두 사람과 비즈니스적 관계를 맺고 있는 조직 구성원들. 피와 살이 튀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그저 일을 할 뿐이다. 창복이 건네는 박카스 한 병이 고단한 일상의 피로를 씻어내는 단물처럼. 창복과 태인이 초희를 처리하기 위해 관계를 맺은 또 다른 조직의 모습은 또 어떤가. 일상이다. 그들은 그게 일이다. 요구르트에 소주를 듬뿍 타서 어린 소녀에게 들이켜라고 강요한다. ‘맛 보려 하지 말고 그냥 삼켜란 강요는 꼭 관객들에게 하는 말처럼 꽂힌다. 이 상황을 굳이 이해하려 들지 말라고. 그저 보이는 그대로 느끼면 된다고. 굳이 역설적이고 아이러니하면서도 관계의 전복이 만들어 낸 이상한 세상의 모습은 이성의 사고와 판단 기준으로 받아 들이지 말라고.
 
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 사진/(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사실 이 영화 속에서 가장 이상한 인물을 꼽으라면 이것 역시 역설적으로 태인 뿐이다. 말을 삼키고 세상과 대화하는 그의 모습은 이 영화 속에서 가장 이상하다. 하지만 그건 감독이 심어 놓은 일종의 역증’(逆證)과도 같다. 일반적인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이 영화의 흐름은 종국에는 모든 것이 가중된 채 폭발해 버리면서 상황의 마침표를 찍는다. 이것조차 아이러니하게도 사건의 해결도 사건의 완성도 없이.
 
소리도 없이를 보면서 가장 많이 느껴지고 가장 많이 다가오는 아이러니역설은 결과적으로 이 영화의 가장 큰 스포일러인 셈이다. ‘소리도 없이는 모든 것을 뒤집어서 보면 된다. 창복과 태인은 소녀를 우여곡절 끝에 유괴한 게 아니다. 본인들이 유괴가 된 것이고, 소녀는 유괴를 당한 게 아니라 세상에 유괴를 당한 창복과 태인을 구원한 셈이다. 두 사람의 결말과 두 사람의 변화가 소녀의 결말과 맞닿아지면서 이 영화의 퍼즐이 맞춰진다.
 
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 사진/(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의 붕괴도, 역설과 역전의 아이러니도 사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본질은 아니다. 어쩌면 소리도 없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미 역설과 역전이 지배하는 역증의 집합체이며 그것을 깨우치기 위해 우리가 인식하는 아이러니를 깨트리는 영리한 발상을 끌어 온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이 영화로 장편 상업 영화 연출 데뷔를 한 홍의정 감독이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계산했다면 충무로가 진짜 괴물을 얻은 셈이다. 개봉은 오는 15.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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