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어주는기자)삶의 측면에서 본 ‘작은 것들’, 그 아름다운 소중함


찰나의 순간은 어쩌면 ‘생의 진실’…우리네 삶처럼 고즈넉이 흘러가는 일상들

크게 크게 작게 작게 2018-11-29 오후 6: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생의 진실이란 건 어쩌면 찰나의 순간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석원 작가의 산문집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을 관통하는 거대한 줄기다. 작가는 그저 우리 곁을 스쳐갈 뿐인 작고 소소한 일상 풍경들에 주목한다. 삶의 정면이 아닌 측면의 이야기, 하지만 어쩌면 생의 진실일지도 모를 무수한 순간 순간들. 책 곳곳에는 ‘작은 이야기들’을 고요히 읊조리고 관조하는 작가의 활자들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원래 집에 식물을 들이면 열에 열은 죽여 내보내는 편이라, 역시 난 그 애도 잘 돌봐주지 못했다. 언젠가 내 방 책장 한 켠을 묵묵히 지키던 어떤 녀석에 대한 얘기다. (중략) 사람이 책임을 질 수 없는 대상에게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책임감은 애초부터 그걸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책임감’)’
 
‘내겐 나를 지나쳐간 사람들의 말투와 웃는 스타일과 주차 방식 등이 내 몸과 마음 곳곳에 인장처럼 박여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그 사람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는데 나는 그처럼 웃고, 그처럼 말을 시작할 때 뜸을 들이고, 그처럼 주차를 하는 것이다. 나는 수많은 나의 동료와 연인과 친구들의 오랜 흔적의 집합체다. 누구든 그런 것으로 삶이 이뤄져 있다.(‘흔적’)’
 
세상에 둘도 없던 친구 상문의 죽음은 작가의 삶에 큰 변곡점이었다. 작가의 인간관계에 나무 같은 존재가 돼 주었던 친구를 잃던 날, 그 순간 순간을 그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앰뷸런스 안에 주검이 돼 누워 있는 친구와 단둘이 남았다.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중략) 그때,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아직은 벌어지지 않은 무언가 엄청난 일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어떻게, 그토록 소중했던 것이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가 있을까, 하고.’
 
14년 전의 그 일로 작가는 세상엔 대체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고,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세상과 작별할 때까지 헤어지면 애석할 존재들을 많이 만나고 자신 또한 그런 사람이 돼야겠다는 다짐도 독백처럼 해본다.
 
밴드 언니네이발관 멤버였던 그는 지난해 23년간의 음악 생활을 중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는 삶을 관조하는 과정에서 살펴준다. ‘평생 의무감에 그림을 그려야 했다’던 프랑스 국민 삽화가 장 자크 상페의 전시를 보며 든 단상들이 흘러간다.
 
‘알고 보니 상페는 원래 다른 일을 하고 싶었으나 거기에는 소질이 없어 부득이 택한 것이 그림이었다. 그랬던 일이 평생의 업이 되고 돈과 명성까지 가져다 주었지만 끝내 열정마저 주지는 못했던 것. (중략) 그런데, 내가 이런 상페의 사연을 알게 된 것이 반가워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최근 그는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걸음의 수가 줄었다. 정체 모를 병에 난생 처음 휠체어에 앉았고 삶이 통째로 바뀌어갔다. 꼼짝없이 누워지내야 하는 시간들이 이어졌지만 오히려 그는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됐다고 고백한다.
 
‘난 끝내 하고픈 게 없는 놈인 것만 같아 낙담했었는데, 걷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꺼운 마음이던지. 허리 때문에 누워 노트에 손으로 글을 쓰다 힘에 겨워 금세 내려놓아야 하면서도, 쓰고 싶다는 마음이, 그 열망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중략) 부디 한 글자만 더. 아시겠는가, 그런 기분.’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고 무너지지 않으려 스스로 끊임 없이 격려하면서 그는 점차 회복 중이다. 이제는 거동이 아주 자연스럽지는 않아도 택시도 타고 서점도 갈 수 있게 됐다. 절망의 한 가운데서도 그는 살아있는 오늘의 ‘순간’을, 그 아름다운 소중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작가의 이야기 외에도 그가 길어 올린 일상의 풍경들은 우리네 삶처럼 고즈넉이 흘러간다. 행복과 불행, 사랑과 이별, 부모와 자식, 여행, 젊음, 서울, 자존, 택시, 알베르토 자코메티전, 아름다운 것 등. 중간, 중간 짧은 호흡으로 감정을 압축한 듯한 운문들은 그의 언어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사진/달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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