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뮤지컬 엘리자벳, 왕관도 드레스도 '화려한 족쇄'였을 뿐


오스트리아 '마지막 황후' 일생 그렸다…네 번째 시즌 맞은 흥행 걸작

크게 크게 작게 작게 2018-12-04 오후 9:33:03

[뉴스토마토 정초원 기자] "난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야/내 주인은 나야/난 원해 아찔한 외줄 위를 걷기를/눈 부신 들판을 말 타고 달리기를/난 상관없어 위험해도 그건 내 몫이야/그래 알아 당신들 세상에서 난 어울리지 않겠지/하지만 이런 날 가둬두지 마."(엘리자벳)
 
지난달 30일 저녁 공연, 뮤지컬 '엘리자벳'의 막이 오른 무대에서 주연배우 신영숙의 '나는 나만의 것'이 울려 퍼졌다. 1막의 엔딩을 알리는 "내 주인은 나야"라는 소절은 공연장을 꽉 채운 관객 전체를 압도하는 듯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찾아 날아가기를 원했던 여인, 황후 엘리자벳이 주는 에너지였다. 
 
사진/EMK뮤지컬컴퍼니
 
최근 공연계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뮤지컬이 흥행하고 있지만, 무려 4시즌 째인 엘리자벳의 주제의식은 그 어떤 작품보다도 여성들이 몰입할 법한 딜레마를 담았다. 극은 자유분방한 소녀 엘리자벳이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오스트리아 황후에 오르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시어머니인 대공비 소피와의 갈등이나 엄격한 궁정 생활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익숙한 스토리이지만, 이 데자뷔가 오히려 신분과 시대를 막론하고 인내를 강요받아온 모든 여성의 삶을 반증한다.
 
극중 엘리자벳은 세 가지 역할을 짊어진다. 왕가를 빛내는 '아름다운 황후', 한 아이를 지켜내야 하는 강인한 '어머니', 그리고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었던 '인간 엘리자벳'. 하지만 엘리자벳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자유로운 삶을 위해 황후로서의 책임감과 모정을 저버린 이기적인 여인'이었을 뿐이다. 이런 세상의 시각은 극중 연사 역할을 하는 루이지 루케니가 '키치'를 부르는 장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사진/EMK뮤지컬컴퍼니
 
"비밀을 말해줄까/황후께선 사실 역겨운 이기주의자/자신을 위해서 하나뿐인 아들을 이용하고 버렸지/중요한 건 오직 그녀 자신만을 위한 자유."(루케니)
 
배우 박강현이 분한 루케니는 때때로 관객석을 누비며 엘리자벳에 대한 소문과 험담을 늘어놓곤 한다. 그가 부른 넘버의 제목이 뜻하듯, 마치 '하찮은 예술품(키치)'을 다루는 듯한 태도다. 이런 루케니의 시선은 곧 대중의 시선이기도 하다. 엘리자벳이 아들을 잃어 오열하는 모습이나 병들어버린 그녀의 정신조차, 거대한 역사의 무대를 구경하는 대중의 이야깃거리로 소비되고 만다. 
 
사진/EMK뮤지컬컴퍼니
 
멸망 직전에 놓인 합스부르크 시대의 암울한 배경도 공연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요소다. 루케니와 조연배우들이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밀크'는 이 공연이 선보이는 앙상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넘버다. 황후의 목욕 탓에 마실 우유가 없어 분노한 국민들이 우유통을 들고 안무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민중의 혁명을 연상케 한다. 
 
극중에서 엘리자벳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유일한 친구는 토드(죽음) 뿐이다. 역사 속 인물을 기반으로 만든 엘리자벳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가상의 캐릭터로, 평생 그녀의 곁을 맴돈 '죽음'을 의인화한 역할이다. 평생 그녀가 염원하던 자유의 길을 결국 이 토드만이 이끌어줬다는 점은 그래서 섬뜩하다. 아름다운 드레스로 치장한 채 '내 주인은 나야'라고 노래하던 1막 엔딩의 엘리자벳보다, 토드에게 이끌려 죽음의 다리로 향하는 그녀의 표정이 훨씬 편안해 보였다고 한다면 너무 슬픈 해석일까. 
 
사진/EMK뮤지컬컴퍼니
 
공연의 감동을 극대화한 것은 단연 배우들의 힘이다. 김소현, 옥주현, 김준수, 박형식 등 이번 시즌의 화려한 캐스팅 소식이 알려지면서 공연 전부터 뮤지컬 팬들의 기대를 모았다. 특히 이날 타이틀롤로 나선 배우 신영숙은 엘리자벳의 소녀 시절부터 노년기까지 위화감 없는 연기로 소화해, 주연배우로서의 가치를 증명해냈다. 커튼콜에서 엘리자벳의 시그니처 드레스를 입고 재등장한 그녀의 눈에서 복받친듯한 눈물이 터져 나올 때, 관객석에서도 화답하듯 박수세례가 쏟아져 나왔다. 토드 역으로 엘리자벳과 호흡을 맞춘 박형식의 재발견도 강렬했다. 공연 내내 이른바 '치명적인 유혹'으로 관객을 사로잡아야 하는 난도 높은 역할이지만, 기대 이상의 가창력과 무대매너로 무대를 누빈다. 
 
한편, 엘리자벳은 1992년 오스트리아의 시어터 안 데르 빈(Theater an der Wien)에서의 초연 이후, 27년 동안 세계 12개 국가에서 공연을 올린 흥행작이다. 누적 관객 수는 1100만명에 달하며, 수많은 비평가들이 유럽 뮤지컬의 걸작으로 꼽는 작품이기도 하다. 
 
올해로써 국내 공연 네 번째 시즌을 맞은 엘리자벳은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내년 2월10일까지 열린다.
 
정초원 기자 chowon616@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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