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연극 '레드'의 막이 오르면…수준 높은 '지적 유희'가 눈앞에


2010년 토니상 최다 수상작…국내 다섯 번째 시즌

크게 크게 작게 작게 2019-02-08 오전 12:00:00

[뉴스토마토 정초원 기자] "난 네가 '생각'하게 하려고 그림을 그린다고. 예쁜 그림이나 만들겠다고 이러고 있는 게 아니야."(마크 로스코)
 
'예술성'이라는 주제를 이토록 지적이면서도 흥미롭게 탐구한 연극이 또 있었을까. 연극 '레드'는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화가 '마크 로스코'와 가상의 인물 '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2인극이다. 100분이라는 시간 동안 두 인물이 주고받는 언어의 리듬은 스쳐 지나가는 대사라고 치기엔 지나치게 밀도가 높다. 철학과 예술, 고대 비극과 미술사를 넘나드는 대사들이 지적 유희를 압도적으로 펼쳐 보인다. 
 
사진/신시컴퍼니
 
연극 '레드'가 흥미로운 것은 무엇보다도 실존 인물인 화가 마크 로스코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시그램 벽화 사건'을 미국 극작가 존 로건이 극으로 풀어냈다. 당시 미술계에 수많은 뒷말을 남겼던 이 사건은 세계적인 주류회사 시그램은 1958년 본사 빌딩에 위치한 '포시즌스 레스토랑'의 벽화 작업을 로스코에게 의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로스코는 계약에 따라 40점에 달하는 연작을 완성시켰지만, 갑작스럽게 계약을 파기하기로 결정해 세간의 의문을 낳았다. 당시 계약금은 무려 200만달러. 작가 존 로건은 '로스코는 왜 돌연 계약을 깼을까'라는 의문에 집중해 대본을 집필했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무대 위에서 재탄생한 연극 '레드'다. 
 
대가와 풋내기의 만남이 으레 그렇듯, 극의 초반에는 성공한 화가 로스코의 강렬한 에너지에 모든 무게중심이 쏠려 있다. 그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진지함'을 넘어선 '절박함'으로 느껴질 정도다.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레드'는 그에게 경전과도 같다. 하지만 한때 아무리 화려하게 타올랐던 불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꺼지고 마는 게 자연의 순리라 하던가. 극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로스코는 젊은 조수 켄이 제시하는 새로운 예술론과 격렬하게 부딪히게 된다. 스스로 예술, 즉 '레드'의 최전선에 서있다고 자부했을 로스코의 자존심은 켄의 논리에 끊임없이 공격당한다. 
 
극 중 로스코는 미국 추상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답게 '재밌고 예쁜 것'만을 추구하는 듯한 팝아트를 경멸한다. 반면 그의 조수 켄은 "그게 뭐가 잘못됐냐"며 팝아트의 가치를 옹호한다. 두 사람의 언쟁은 문화예술계의 단골 논쟁인 '예술성'과 '대중성'의 대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중년의 로스코는 "지금을 뛰어넘는 그림을 그려야 해. 팝아트는 완전히 일회용이야"라고 못 박지만, 그의 대척점에 선 젊은이 켄은 "대중적인 게 왜 나쁜 거냐"고 맞선다. 
 
사진/신시컴퍼니
 
팽팽한 논쟁 끝에 켄이 가한 회심의 일격은 이 작품의 주제를 관통한다. "자식은 아버지를 몰아내야 한다, 존경하지만 살해해야 하는 거라고 하셨죠? 팝아트가 추상표현주의를 몰아내 버렸거든요." 그간 로스코가 지지해 온 추상표현주의의 가치는 켄의 날카로운 대사 앞에서 '낡은 것'으로 전락해버린다. '새로움'이라는 요소를 잃어버리는 순간 그 작품의 가치 또한 상당 부분 훼손돼 버리고 마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다. 
 
하지만 극 중 로스코를 그저 '지나간 구세대'로만 치부해버리기에는 인물의 내면이 흥미로울 정도로 복잡하다. 그는 스스로 쌓아온 단단한 예술의 가치를 지키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켄의 가치를 인정해준다. 이와 동시에 물질에 저당잡힌 세상의 탐욕에 맞서 혼자만의 예술적 투쟁을 이어간다. 예술성과 대중성, 세대와 가치관, 정신과 물질을 넘나드는 고뇌 속에서 이 중년의 화가는 자신만의 '레드'를 화폭에 칠한다. 
 
그리하여 숨막히는 이 연극의 막이 내리는 순간, 로스코라는 캐릭터가 단 한 가지 성취만은 틀림없이 해냈다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난 네가 생각하게 하려고 그림을 그린다"던 그의 강경한 외침처럼, 관객들은 극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깊은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으므로. 
 
사진/신시컴퍼니
 
한편, 연극 '레드'의 로스코 역은 강신일, 정보석이 맡았으며, 켄 역은 김도빈, 박정복이 연기한다. 공연은 오는 10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정초원 기자 chowon616@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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