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게이션)‘판소리 복서’, 동틀녘 찬란한 어둠 속 희망의 빛


단편 ‘뎀프시 롤: 참회록’ 원작 장편…단편 ‘어둠’ vs 장편 ‘희망’

크게 크게 작게 작게 2019-10-11 오전 12:00:00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일반적인 영화의 서사와 흐름이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묘하게 재미와 흥미를 끌고 간다. 우선 리듬이 중요하다. 영화의 소재인 복싱과 판소리는 리듬이 생명이다. 복싱은 상대의 리듬을 잃고 빼앗아야 한다. 경기의 흐름을 잡아야 한다. 그 흐름을 잡기 위한 투기 경기다. 판소리는 장단이라고 부른다. 각각의 장단에 감정을 실어서 얘기를 전해야 한다. 전혀 공감대가 형성되기 어려운 두 가지 소재가 결합됐다. 영화 판소리 복서는 교감에 대한 얘기다. 교감의 대상은 누군가의 상대일 수도 있다. 관객일 수도 있다. 그리고 영화 속 주인공 병구(엄태구)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신호일 수도 있다. 방식이 기존 영화와는 전혀 다르기에 낯설고 어색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재미를 느끼고 찾는다면 이 영화의 따뜻함은 분명히 가장 큰 미덕이 될 것이다. 반대로 그 지점이 낯설기만 하다면 이 영화의 미덕은 독립영화란 틀 안에서 펼쳐질 수 있는 창작의 개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듯싶다.
 
 
 
주인공 병구는 어수룩하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운동 선수 같다. 복싱을 한단다. 교회에서 기묘하게 예배를 보는 박관장을 찾아와 복싱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큰 결심을 드러낸다. 박관장은 병구의 결심에 심드렁할 뿐이다. 선수 자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병구는 허당스럽다. 조용한 교회가 떠들썩하게 환호를 한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갈팡질팡하며 병구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어딘가 모르게 병구가 이상하다. 이건 그냥 웃기려는 인물의 행동 설정은 아니다. 병구, 전직 복싱 선수다. 지금은 펀치 드렁크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사연이 있어 보인다. 박관장은 그 사연을 알고 있는 듯하다.
 
박관장과 병구가 함께 있는 복싱 체육관. 한 눈에 봐도 폐업 직전이다. 교환(최준영)은 이 체육관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교환은 선배인 병구를 막 대한다. 수건을 빨아 오라며 얼굴에 내던진다. 트레이닝 도중 병구의 얼굴에 주먹을 냅다 휘두르고 쓰러진 병구를 향해 비웃음을 쏟아낸다. 하지만 병구는 괘념치 않는다. 박관장도 마찬가지다. 박관장은 그저 오늘 신입 관원은 없고” “피죤 떨어졌다. 얼릉 가서 사와등 병구를 막대하긴 마찬가지다. 이 모든 상황이 이상하고 괴상하다. 그러던 어느 날 병구가 돌린 전단지를 보고 찾아온 민지(이혜리). 민지는 병구에게 복싱을 배운다. 어수룩한 병구를 착한 남자라고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다. 체육관의 어린 관원들 조차 무시하는 병구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민지가 병구를 인정한다. 그런데도 병구는 자신을 나쁜 남자라고 선을 긋는다.
 
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 사진/CGV아트하우스
 
병구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 때 잘나가던 복싱 선수다. 체육관 한 켠에는 병구의 잘 나가던 시절 모습이 담긴 빗바랜 사진이 나 뒹굴고 있다. 그 모습은 병구의 추억이고 포기 못한 꿈이다. 병구는 그 시절 친구이자 연인 지연(이설)과 함께 꿈을 꿨다. 지연은 장구를 치며 한국의 장단을 전 세계에 소개하는 국악인이 목표였다. 병구는 지연의 장구 장단에 맞춰 자신만의 리듬을 갖춘 복싱을 개발했다. ‘판소리 복싱’. 병구는 판소리 복싱을 통해 다시 한 번 링 위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지연이 없다. 병구 스스로도 예전의 몸이 아니다. 병원 의사는 펀치 드렁크후유증으로 점차 기억을 잃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아무도 없는 자신의 컨테이너 골방에서 약을 먹으며 버티는 병구다. 기억 속에서 그는 지연의 장구 장단에 맞춰 판소리 복싱을 하고 있다. 이제 병구는 진짜 링에서 복싱을 하고 싶다. 다시 하고 싶다. 옛 연인 지연과 함께 아직 완성하지 못했던 자신만의 판소리 복싱.
 
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 사진/CGV아트하우스
 
판소리 복서는 연출을 맡은 정혁기 감독의 단편 뎀프시롤: 참회록을 장편으로 전환시킨 작품이다. 단편은 어둡다. 죽음의 그림자가 26분 분량 속에 깊게 드리워 있다. 반면 이번 장편은 조금 다르다. 죽음 보단 기억이다. 그 기억은 사라지기 직전이다. 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한 동틀 녘 바닷가에서 판소리 장단에 맞춰 쉐도우 복싱을 하는 병구와 장구를 신명 나게 치는 지연의 모습은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 병구는 동이 트기 직전 밝은 태양 아래 화려함을 꿈꾼다. 이제 링 위에 올라 자신의 비기 판소리 복싱을 선보이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동이 트기 직전이다. 병구의 기억도 아직은 동이 트기 직전이다. 동틀 녘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어둠 속 희망을 그리고 있는 얘기가 바로 판소리 복서.
 
그래서 영화는 비참하고 비루하지만 희망이 있다. 그래서 어둡지만 결코 어둡지 않다. 매번 어깨가 들썩이는 장단과 함께 병구의 기억과 희망과 꿈에 얼씨구라며 추임새를 넣게 된다. 영화 배경 음악으로 쓰인 판소리와 장단은 병구의 웃기고 슬프지만 결코 어둡지 않은 현실의 해학을 대변한다. 모든 것이 엇박자를 내고 있지만 모든 것이 반대로 기묘하게 맞물려 돌아간다.
 
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 사진/CGV아트하우스
 
엇박으로 관객들의 집중을 끌고 가는 이 영화의 이상한 힘은 배우들의 이질적인 연기 리듬이 더해지면서 더욱 힘을 발휘한다. ‘병구를 연기한 배우 엄태구는 악역 일변도의 연기 스타일에서 완벽하게 단계적을 진화를 거듭한 모습을 선보인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 배우의 연기는 분명히 진화의 단계를 넘어섰다. 호불호가 갈리는 극도로 허스키한 목소리가 이번 영화에선 오히려 귀에 감길 정도다.
 
박관장을 연기한 김희원, ‘민지를 연기한 이혜리’, ‘교환역의 최준영, ‘지연역의 이설, ‘장사장역의 최덕문 등 모든 배우가 기능적으로 소비되지 않은 점도 칭찬할 만하다.
 
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 사진/CGV아트하우스
 
연출을 맡은 정혁기 감독 외에 이 영화의 원작인 단편에서 주인공 병구를 연기한 배우 조현철이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 참고로 판소리 복싱은 대학 시절 취미로 복싱을 배운 조현철이 판소리 가락에 맞춰 쉐도우 복싱을 하는 모습을 보고 정혁기 감독이 생각한 내용이다. 10 9일 개봉.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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