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 바버샵, 크루즈까지…오감 체험 '음악 소비' 시대


잔나비 보고, 머리 하고, 강연 듣고…'음악 호캉스' 된 이태원

크게 크게 작게 작게 2019-11-01 오전 6: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입장끈을 두르자 객실키 패킷이 손에 자동으로 딸려왔다. 246번 녹색 다이아몬드 열쇠와 웰컴 드링크, 성냥, 양말, 통조림통…. 하루치 투숙객을 위한 것 같은 이 패킷은 실은 공연 관람객을 위한 굿즈. 가상의 호텔을 콘셉트로 한 이 공연장 일대에선 잔나비 공연을 보다 머리를 하고, 수영장 의자에 누워 DJ가 틀어주는 음악을 듣는 것이 가능했다.
 
최근 대중음악의 소비 형태가 점차 오감으로 확장되고 있다. 단순히 귀로 즐기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닌 특정 공간에서, 특정 콘셉트를 띈 채 진화하고 있다. 유튜브, 스트리밍, 소셜미디어(SNS) 중심이던 음악 서비스의 '탈온라인화'. 이제 관객들은 다시 실제 공간으로 향하고 있다.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오감 체험 음악 열풍이 새롭게 불고 있다.
 
25일 서울 한남동 현대카드 스페이스(뮤직라이브러리, 스토리지, 언더스테이지) 앞에 걸린 '다빈치모텔' 간판.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잔나비 보고, 머리 하고, 강연 듣고
 
25일 오후 5시 경, 서울 용산구 한남동 현대카드 바이닐앤플라스틱 앞. 평소 바이닐(LP), CD를 팔거나 문화 행사를 하던 이 공간 앞에 거대한 빨간색 네온 간판이 내걸렸다. '다빈치 모텔(Davinci Motel)'.
 
손에 쥔 수십개 네모 화면들이 깜빡대며 이 간판을 기념물처럼 찍어댔다. 입구에 들어서자 쇼파에서 TV를 보는 연인과, 바버샵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청년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 2층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다방 DJ의 목소리. "아아…, 아. 자, 사연이 왔네요. 저는 하정우를 좋아하는데 잔나비를 보고 갑니다. 잔나비 좋아하는데 아도이 음악 틀어주세요." '투숙객들(관람객들)'이 박장대소했다.
 
'다빈치모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바버샵.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인근 뮤직라이브러리는 버스킹 현장으로 변했다. '시크릿 게스트'로 깜짝 출연한 밴드 잔나비가 투명 유리창을 반쯤 연채 노래하자 수백 인파가 삽시간에 몰려 들었다.
 
이날부터 이틀간 열린 행사는 현대카드가 올해 처음 선보인 신개념 문화프로젝트다. 미국 캘리포니아 '모터호텔(Motor Hotel)'에 착안한 행사('다빈치 모텔')는 이 일대를 '음악 호캉스' 분위기로 바꿔 놓았다.
 
호텔 콘셉트로 꾸며진 공간에는 침실부터 바버샵, 음악다방, 옥상 수영장 등이 설치됐다. 물이 없는 수영장을 제외하고는 전부 체험 가능한 공간들. 이 가상 호텔 인근에선 예술, 철학, 과학, 수학에 뛰어난 '현대판 다빈치들'의 토크와 공연, 퍼포먼스, 버스킹이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 이어졌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을 비롯해 배우 하정우, 소설가 김금희, 디자이너 김훈, 밴드 잔나비 등이 출연한 이 곳엔 주최 측 추산 이틀 간 1만5000여 관객들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
 
차경모 현대카드 홍보 과장은 “현재 한국에는 음악이나 강연만 쭉 이어지는 행사는 너무도 많다. 기획 단계부터 이런 흐름에서 조금 탈피하고자 했다”며 “티켓과 함께 모텔 키, 양말, 쿠폰을 받는 과정 등 재미적, 차별적 요소를 고려했다. 이런 요소들이 감성적인 만족감과 지적인 만족감을 동시에 제공했을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25일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에 '시크릿 게스트'로 참가한 밴드 잔나비. 사진/현대카드
 
뮤지션의 일일 카페·주점·타로점집
 
"'슈퍼밴드'에 나온 그 과학 선생님 맞습니다."
 
26일 오후 4시경, 서울 연희동 인근 연희예술극장 안. 밴드 눈뜨고코베인이 고막을 찢을 듯 무대위를 종횡하던 순간, 그 옆에 실험실 가운을 입은 이가 눈에 띄였다. 음악프로그램 '슈퍼밴드'에 출연했던 '과학교사 뮤지션' 안성진. 커다란 테이블을 펼쳐 놓은 위로 비커들이 즐비했다. 칵테일 농도를 조율하고 있었다.
 
"오늘은 공연 대신 칵테일 팔러 왔습니다. 마시멜로도 굽고 있어요."
 
'슈퍼밴드' 출연한 과학교사 뮤지션 안성진.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바로 옆에는 재주소년과 그가 운영하는 애프터눈레코드 소속 뮤지션들이 볶음밥과 커피를 팔고 있었다. 캠핑을 콘셉트로 편안한 텐트와 의자를 설치하고 공연 보러 온 관객들에게 잠깐의 휴식을 제공한다.
 
이날 연희동 인근에서는 뮤지션들이 직접 나와 일일 장사를 하는 팝업스토어가 열렸다. 인디 뮤지션들의 릴레이 공연 '주파수, 서울' 일환으로 진행된 행사는 무대 옆 뮤지션들이 직접 운영하는 카페와 바(Bar), 심리상담소 등이 차려졌다.
 
연희예술극장 인근 연남장 2층에서 만난 뮤지션 정우는 친구들과 함께 할로윈 콘셉트로 바를 차렸다. 애리, 곽푸른하늘 등 다른 뮤지션들은 타로점, 사주팔자를 봐주는 스토어도 차려 놓았다. 이 행사를 기획한 인디음악 팟캐스트 '랏도의 밴드뮤직'의 조재우 대표는 "평소 라디오나 온라인 상으로 각자의 집에서 즐기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싶었다"며 "비슷한 취향, 공감이 형성된 이들끼리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자리를 구상하고 현실화시켜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뮤지션 정우(왼쪽)와 지인들이 할로윈 콘셉트로 일일 바(Bar)를 차렸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LP 가게 된 갤러리·크루즈 EDM 파티
 
26일 밤 9시까지 홍대 인근의 '요기가' 갤러리에서는 중고 LP 음반 스토어가 팝업식으로 열렸다. 매주 토요일마다 대구 등 지방에 사는 콜렉터들이 중고 LP들을 박스채 이 곳에 진열한다. 손때 묻혀가며 예쁜 앨범 커버를 찾아대는 이들 입가에 웃음이 만개했다.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는 "온라인 상의 음악 소비에만 만족하지 못하고 '사고, 보고, 만지고 내가 여길 왔다'는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현상이 최근 일고 있다"며 "LP 구매에 이어 최근 오프라인 음악 잡지들이 창간하는 것도 이런 현상으로 보인다. 당분간 음악과 결합된 전시나 작품 등의 오프라인 시장이 속속 등장하고 더 확대될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열풍에 최근에는 체험 기반의 대형 해외 뮤직페스티벌까지 한국에 상륙하고 있다. 30일 공연홍보사 PRM에 따르면 내년 8월 세계 최대의 크루즈 EDM 뮤직페스티벌 '잇츠더쉽코리아'가 한국에서 열린다.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20만명 가량 동원한 '빅 페스티벌'이다. 휴양과 여유를 주제로 삼고 3박4일간 출항하는 초대형 크루즈 위에서 공연한다. 배에 승선하는 순간 총 44개의 팝업 액티비티를 공연과 함께 즐기게 된다. 행사 주최사인 크루즈랩의 장우석 대표는 18년째 크루즈업계에 종사하다 이 행사를 들여오게 됐다. 그는 "잔디밭에서 혹사당하며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는 다른 페스티벌과 차별점을 갖기 힘든 시대"라며 "내년 선상 축제는 '오감체험' 완결판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했다.
 
내년 한국에 상륙하는 세계적인 크루즈 뮤직 페스티벌 '잇츠 더 쉽 코리아'. 사진/BEPC탄젠트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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