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안전 불감증의 치유



크게 크게 작게 작게 2020-05-18 오전 6:00:00

전재경 사회자본연구원장
제천 화재에 이은 이천 화재 참사를 보면서 안전문제를 생각한다. 고위 공직자들은 제천 때 밝혔던 입장을 이천에서도 밝혔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국민과 공직자들의 신뢰를 자주 배반한다. 안전관리는 기본적으로 규제사무에 속한다. 그래서 총리실 규제개혁위원회에서도 종래 안전 전문가를 위원으로 위촉하여 안전에 관한 규제의 합리화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물론 모든 기업들은 규제 자체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환경과 안전, 그리고 성인지 사무는 규제 강도가 높은 편인데 기업들은 여기에 대해서도 반대의견이 많다. 경제가 어렵다거나 경제를 활성화시키자고 말할 때마다 기업들은 "규제가 문제다. 규제를 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어느 일면 일리가 있다.
 
정부의 규제체계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규제사무를 다루는 정부기관들의 자세도 문제다. 관계 행정기관들은 수많은 행정규제와 그 위반에 대한 처벌을 행정 편의적으로 설계하기 쉽다. 규제를 규정한 법령안들을 보면, '정당한 법의 절차(due process)'라는 원칙이 요구하는 적정성, 합리성, 또는 적응성이 미흡하고 그 대신 편의성과 즉응성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부족한 탓이라고 이해하지만 규제를 받는 입장에서는 애매함이 많다.
 
환경, 안전, 성폭력 등에 대하여 엄정하게 대처하자면 원천적인 규제체계 자체가 공정하고 공평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법률에 올려서 규정하여야 마땅한 것을 입법과정 상의 수고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에 규정한다든지, 심지어는 부분적인 위임사무를 담아야 할 고시에 독자적 법령체계를 집어넣는다든지 하는 등의 입법의 남용이나 과오를 피해야 한다.
 
행정처벌은 점차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구성요건이 치밀하지 못한 상태에서 처벌의 강도만 높여서는 법의 실효성이 떨어진다. 기소 주체들이 법정에서 고의·과실을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행정형벌은 정부간 사무분장에 따라 법무부 소관 사무로 분류되어 규제개혁위원회에서 다루지 아니한다. 실체적 조항을 검토할 때 그에 따르는 행정처벌도 함께 검토되어야 마땅하다.
 
안전관리 전문가들의 전언에 따르면, 현업에 안전관리 규정이 없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공사나 활동 현장에서는 매뉴얼에 따라 안전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책임자가 없었다. 안전관리자는 총괄 책임자의 지시가 없거나 부적절할 때 이를 거부하고 안전을 지킬 의무가 있다. 규제제도만 있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현장에서 매뉴얼을 준수할 소신과 역량을 갖춘 안전관리자 불가결하다.
 
규제를 집행하는 주체 쪽에서 나름대로의 개선노력을 기울인다면 피규제자들도 이에 상응하는 협력이 필요하다. "규제를 모두 없애라"거나 "솜방망이로 만들라"는 등의 규제를 부인하는 입장은 물론 존재하지 아니하지만, 규제를 외면하거나 회피하려는 사계의 탈법현상이 근절되어야 한다. 교통신호 체계에서 볼 수 있듯이 민간의 협력은 외곽에서 규제가 포상 체계가 작동될 때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유럽연합(EU)에서 볼 수 있는 배출권거래제도(ETS)가 같은 예에 속한다. 다수의 EU 국가들은 탄소세(Carbon Tax)를 운영하면서 교토 메커니즘에 따른 배출권거래제를 시행한다. 탄소세를 부담하기 싫은 기업들은 청정거래체계(CDM)와 같은 탄소상쇄 사업을 실시하여 크레딧을 얻거나 시장방식에 의존하는 배출권을 기업간에 거래하여 감축의무를 이행한다. 우리나라는 탄소세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규제체계가 있지만 포괄적이지 아니하고 시장방식과 연동이 약하다. 온실가스 행정규제의 엄격성이 자발적인 배출권거래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규제 체계를 존속시키면서도 피규제자들이 피부로 규제를 느끼지 않고 자발적으로 규제에 적응하는 방도를 넓힐 필요가 절실하다. 외곽에 원래의 행정규제가 있음을 전제로 규제자와 피규제자가 자발적 협약(volunmentary agreement)을 활용해 볼 일이다. 자발적 협약에서는 피규제자가 일정 요건을 준수하고 과정을 성실하게 이행하면 법령에서 규정한 규제사무의 일부를 절차적으로 생략하거나 아예 규제준수의무를 면제시킨다. 현행 법률에도 환경 등 일부 부문에서 자발적 협약이 시행되고 있으나 적용을 확장시킬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전재경 사회자본연구원장(doctorch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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